유럽식 독서법

“젠장. 또 고슴도치를 터뜨렸나봐.”아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속도와 방향을 조정하고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고압분사기로 자동차 바퀴에 묻은 살점이며 핏자국을 불어내며 맥주를 마신다. 죄의식은 유럽인들의 발명품에 불과하고, 소녀 한 명 사라진다고 한들 인류가 통째로 휘발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유럽은 내 상상보다도 훨씬 넓고 모호하기 때문에 살인자를 찾아내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어디서든 나는 여전히 자유로울 것이고 그 자유가 스스로를 노동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몽상도 자동차와 직업이 사라진 내겐 더이상 자극적이지도, 오래 지속되지도 않았다. 오른쪽 다리를 저는 소녀가 정말로 내게서 자동차와 직업을 훔쳐간 것일까? (...) 자동차와 직업이 사라진다면 당연히 독서도 불가능해진다.


이 소설의 목적지에 이르러 나는 그 소녀의 목소리나 냄새, 표정이라도 당신에게 말해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여 첫 문장부터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보았지만, 독서가 거듭될수록 소녀는 아내에서 아이로, 그다음엔 거미로 변해사더니 나중엔 검고 작은 돌멩이의 모습에 수렴되었다. 그리고 당신의 얼굴이 어쩐지 나와 닮아 있을 것이라는 몽상이 안개처럼 밀려들었다. 그러니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차라리 청동거울에 가까울지도 모른다.